전통 판각을 두고 종종 개인 예술가의 창작 행위로 이해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적·출판사적 관점에서 보면, 판각은 본래 개인의 미적 표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출판과 복제를 전제로 한 사회적 기술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명확히 구분된다.
판각은 단순히 나무를 새기는 기술이 아니다. 판각은 책을 만들기 위한 도구, 다시 말해 출판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공정이었다. 동아시아의 출판 문화에서 판각은 ‘작품’이 아니라 ‘매체’였고, ‘표현’이 아니라 ‘전달’의 기술이었다.
출판을 전제로 한 판각의 탄생
목판 인쇄가 본격적으로 활용된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의 판목으로 수십, 수백 권의 동일한 내용을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 소장의 예술품을 만들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지식과 사상을 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한 기술였다. 조선 시대의 경전, 불서, 의서, 문집, 향약서 대부분은 판각을 통해 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판각자는 저자가 아니었고, 창작자가 아니었으며, 출판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자였다. 판각의 목적은 ‘나만의 표현’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정확히, 오래, 많이 남기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판각은 개인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출판 행위의 일부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협업 구조로 완성된 판각 시스템
전통 판각은 결코 개인 작업이 아니었다. 기획자(저자 또는 발원자), 교정자, 판각자, 인쇄자, 유통 주체가 분리된 협업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의 전통 목판 인쇄 문화에서도 판각은 개인 작가 중심이 아니라 출판사 주도의 제작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졌다. 출판사는 내용을 기획하고, 시장성을 판단하며, 판각과 인쇄를 관리하고 유통을 책임졌다. 이 구조 속에서 판각은 하나의 ‘창작물’이 아니라 출판을 실현하는 공정이었다. 판각가 개인의 미감이나 해석이 개입될 여지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개인 창작 판각은 ‘다른 영역’이다
20세기에 들어 개인이 직접 그리고, 새기고, 찍는 방식의 판화 운동이 등장하면서 판각은 예술적 창작의 도구로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전통 판각의 연장선이 아니라, 전통 출판 판각과 의도적으로 구분된 새로운 흐름이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한 반증이 된다. 개인 창작 판각이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존의 판각이 개인 창작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전통 판각과 개인 창작 판각은 기술적으로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목적·의미·맥락이 전혀 다르다. 전통 판각은 출판을 위한 것이고, 개인 창작 판각은 표현을 위한 것이다.
판각을 출판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전통 판각을 개인 작품으로 해석할 경우, 판각이 지닌 가장 중요한 가치가 흐려진다. 판각은 ‘한 사람의 재능’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시대의 지식과 신앙, 제도와 사상을 집단적으로 보존한 기록 기술이다. 따라서 전통 판각을 계승한다는 것은 ‘내 작품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하고,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며, 반복 인쇄와 보급을 전제로 한 출판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전통 판각을 개인 창작물로 접근하는 것은 기술을 차용한 현대적 표현일 수는 있으나, 전통 판각 그 자체의 의미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 판각의 본질은 ‘출판 문화’다
전통 판각은 예술 이전에 출판이었고, 개인 이전에 공동의 기록이었다. 판각을 출판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왜 판각에 정확성과 절제가 요구되었는지, 왜 개인의 해석이 배제되었는지, 왜 복원이 중요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 판각은 개인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시대의 내용을 남기기 위한 기술이었다.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전통 판각을 논하는 출발점이다.
정안뉴스 안정주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