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흙을 밀고 당기고, 물레를 돌리고, 불 앞에서 기다렸던 시간이 손끝에 고스란히 쌓인다. 경북 고령에서 오랫동안 흙과 함께 살아온 평전(坪田) 염상우 도예가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의 그릇이나 도자기를 넘어 대가야의 오래된 역사와 고령의 흙, 그리고 불을 다루며 살아온 한 사람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뜻밖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그가 흙으로 만들고 싶은 세계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주 먼 곳, 밤하늘 너머의 우주와 행성을 향하고 있었다.
- 고령의 흙에서 시작된 시간
염상우 도예가는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전통 도예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운영해 온 평전도예는 고령 지역에서 전통 도예의 맥을 지켜온 공간이다. 고령은 대가야의 옛 도읍지이면서 도자기의 중요한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에게 고령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작품 활동을 하는 장소가 아니다. 자신의 작품세계가 시작되는 뿌리이자 흙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삶의 터전이다.
그의 도예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스승 백영규 사기장이다.
염상우는 스승에게 전통 도예의 기술과 정신을 배웠다. 흙을 고르고 형태를 만들고, 유약을 입히고 불을 다루는 것까지 도자기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전통은 책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스승의 손을 바라보고, 실패한 작품을 깨뜨리고, 다시 흙을 반죽하고, 가마 앞에서 기다리면서 몸으로 익혀가는 것이다.
염상우 역시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흙 속에 쌓아왔다.
- 만드는 사람에서 가르치는 사람으로
염상우의 도예 인생에는 작품 제작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 있다.
교육과 전승이다.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흙을 만지고 물레를 돌리며 토기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전해왔다.
흙을 만지는 순간 아이들은 수백 년, 수천 년 전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재료를 만난다. 교과서 속 역사가 손끝의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염상우의 도예 활동은 제작, 전승 그리고 교육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승에게 배운 것을 작품으로 남기고, 다시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한다.
한 사람의 기술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그것은 문화가 된다.
- "지구도 하나의 도자기와 같다"
염상우의 우주에 대한 꿈을 이해하려면 다시 그의 스승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는 스승의 말이 있다고 한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도자기와 같다."
처음 들으면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도예가의 눈으로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지구의 깊은 곳에는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다. 그 위로 단단한 지각이 형성되어 있고, 표면에는 흙과 물 그리고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스승은 그런 지구의 모습을 하나의 거대한 도자기에 비유했다고 한다.
도자기 역시 흙에서 시작한다. 도예가의 손에서 형태를 갖추고 뜨거운 불을 거치면서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이 광대한 우주 어딘가에도 지구처럼 내부에 아직 식지 않은 열기를 품고 있는 또 다른 행성이 있지 않을까.
그 행성 역시 하나의 거대한 도자기처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스승이 던진 생각은 염상우에게 오랫동안 하나의 질문으로 남았다.
- 스승의 한마디가 제자의 꿈이 되다
어쩌면 스승이 제자에게 남기는 가장 큰 유산은 기술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레를 돌리는 방법은 배울 수 있다. 유약을 만드는 방법도 기록할 수 있고, 가마를 다루는 기술 역시 전수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지구도 하나의 도자기다."
스승에게서 들었던 그 한마디는 시간이 흐르면서 염상우 자신의 작품세계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행성은 어떤 도자기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질문을 품은 그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천체망원경으로 달과 행성을 바라보고, 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우주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이 바라본 행성들을 흙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다.
행성의 거친 표면과 분화구,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과 빛깔을 자신만의 도예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 고령의 흙으로 우주의 행성을 만들다
생각해 보면 흙과 우주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매일 밟고 있는 지구도 우주에 떠 있는 하나의 행성이다. 그리고 염상우가 평생 만져온 흙 역시 그 행성에서 태어난 물질이다.
그 흙을 둥글게 빚으면 작은 행성이 된다.
그리고 가마에 들어간다.
뜨거운 불을 견디면서 흙의 성질이 변하고 유약은 예상하지 못했던 색과 표정을 만들어낸다.
가마에서 나온 우연한 흔적은 때로 달의 분화구를 닮기도 하고, 어느 행성의 황량한 대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도예가에게 가마는 작은 우주인지도 모른다.
- 고령의 흙으로 행성을 만든다.
그의 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승이 바라보았던 '도자기로서의 지구'를 이제 제자는 자신의 손으로 수많은 행성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한다.
평전, 평평한 밭이 되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면서 필자는 문득 그의 호 '평전(坪田)'이라는 두 글자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평전.
말 그대로 풀이하면 평평한 밭이다.
밭은 자신을 위해 열매를 맺지 않는다.
누군가 씨앗을 뿌리면 그것을 품어주고, 뿌리가 내릴 자리를 내어주며, 시간이 지나 열매를 맺을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어쩌면 한 사람의 스승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백영규라는 스승이 염상우에게 흙을 만질 수 있는 밭이 되어주었다면, 이제 염상우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밭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에게서 받은 기술과 철학, 그리고 "지구도 하나의 도자기와 같다"는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아름다운 상상.
그 씨앗은 한 제자의 마음속에 떨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우주의 행성을 도자기로 만들겠다는 꿈으로 자라났다.
그렇다면 언젠가 염상우가 품고 있는 그 꿈 역시 그의 제자들에게 또 하나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필자는 그의 꿈이 그의 제자들에게 '평평한 밭'이 되어주는 날을 생각해 본다.
그 밭 위에서 어떤 제자는 전통을 이어갈 것이고, 또 어떤 제자는 스승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전승일지도 모른다.
스승과 똑같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만들어준 단단한 땅 위에서 자신의 꿈을 시작하는 것.
- 흙에서 시작해 우주로, 그리고 다시 사람에게
염상우의 이야기는 결국 흙에서 시작했다.
고령의 흙에서 대가야와 고령 백자를 만났고, 스승에게서 도예의 기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그의 시선은 우주를 향한다.
그러나 그의 꿈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어쩌면 우주가 아니라 사람인지도 모른다.
스승의 생각이 제자의 작품으로 이어지고, 그 제자의 작품과 꿈이 다시 다음 제자의 상상력을 깨우는 것.
그렇게 문화는 이어진다.
한 사람의 생은 끝날 수 있지만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심어놓은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평전 염상우는 오늘도 고령의 흙을 만진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천체망원경 너머의 먼 우주를 향하고 있다.
그곳에는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행성이 떠 있다.
언젠가 그의 가마 문이 열리는 날, 그 안에서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품을 바라보던 한 제자가 또 다른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
스승은 지구를 하나의 도자기로 바라보았다.
제자는 그 말에서 우주를 빚는 꿈을 발견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제자의 꿈은 또 다른 제자가 꿈을 심을 수 있는 평평한 밭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이 필자가 바라본 평전(坪田) 염상우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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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뉴스 안정주 기자 |























